여러분은 과거에 어떤 분에게 큰 잘못을 범했는데 그 분이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해주신 경험이 있습니까? 아니면 중병에 걸렸었는데 살려달라고 기도한 결과 살아나신 경험이 있습니까? 잘못으로 인한 죄책감이나 죽을 병으로 고통 중에 진솔한 마음으로 고백하였더니 죄책감이나 고통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복음이 주는 자유입니다.
복음은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며 죄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을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를 빌고, 정결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을 위한 좋은 소식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첫 외침도, 예수님의 첫 외침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였으며(막 1:15; 마 3:2, 6, 11, 4:17; 눅 3:3), 예수님의 산상수훈 설교의 팔복에서도 자신의 죄에 대하여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마 5:4) 오순절 성령강림 후 초대교회의 복음 전파의 주된 내용도 죄에 대한 회개의 외침이었습니다(행 2:38; 3:19; 5:31).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려면 반드시 회심, 회개해야 합니다.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죄가 없는 의인으로 여기며, 회개나 죄 용서함이 필요 없다고 하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주된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과,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는지 그 근본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7절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성 어거스틴은 ‘주여! 이 악한 내 자신을 구원하소서’하였으며,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가이자 장로교 창시자 John Knox 는 ‘젊었을 때나 중년일 때나 많은 싸움을 치른 세월이 지난 지금이나 나는 내 자신이 얼마나 부패하였는지 안다’고 노년에 고백하였으며, 또한 영국 개신교회에서 감리교 운동을 시작한 John Wesley도 ‘나는 하나님의 영광에 멀리 떨어져 있다. 내 마음은 부패하고 악하여 내 전 생애는 마치 악한 나무에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도 같다’고 하였습니다. 바울도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 모든 정직한 그리스도인의 대표적인 고백을 하였습니다. 우리도 과거에 주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눈물과 콧물을 쏟으면서 회개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자신이 의인이라고 고백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사실은 이 땅에 의인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시 14:1-3)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을 의인으로 여깁니다.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이 소망이나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이 필요하다고 시인하지 않으니까요. 복음, 좋은 소식은 먼저 나쁜 소식 곧 인간의 부정적인 면을 선포합니다. 바로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며, 죄의 결과 지옥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서 첫 단계는 이 사실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즉, 복음을 받는 첫 단계는 자신이 죄인임, 잃어버려진 영혼임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병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고침을 받으려고 하듯이, 자신의 영혼이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Slide 2] 그러므로 중생, 회심이란 자신이 죄로 인하여 사망선고를 받았었다는 것과 믿은 후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러 죽을 병들을 고치시는 기적과 마귀를 멸하시는 능력을 보이신 주님께서는 문둥병자를 고치시고(1:40-45),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1-12절). 그 후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는 이런 의문들이 생겼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죄를 용서하실 수 있나? 누구의 죄는 용서를 받으며 누구의 죄는 용서를 받지 못하는가? 죄 용서함의 기준은 무엇이며, 제한이 있는가? 조건은 있는가?’
오늘날 복음, 진리의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동일한 사건을 본 사람들 중에 예수님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긍정적인 반응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동네를 떠나 다시 갈릴리 바닷가에 나가셔서 무리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13절).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14절). 마태복음에서는 마태로 말하고 있습니다(마 9:9). 아마도 예수님께서 히브리식 이름 레위를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뜻의 ‘마태’라고 다시 명하여 부르신 것 같습니다. 마치 시몬을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 라고 새로 이름을 주셨듯이 말입니다.
레위(마태)는 세관에 앉아 세금을 거두는 세리였습니다. 식민지 생활하던 자기 백성들에게 로마제국 정부의 관원으로서 세금을 거두는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에 충성하는 유대인이었으니, 그것도 세금을 거두는 사람으로 동족들에게 반역자, 배신자 소리를 들어야 했던 자였습니다. 또한 직업상 일정액의 세금보다 더 많이 거두어서 자신의 수입으로 삼든가, 부자나 권력가들에게서는 제대로 세금을 거두지 못하고, 힘없는 장사꾼들이나 비천한 사람들에게는 더 세금을 거두었으니 그들에게 욕을 먹으며 죄인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신정정치(Theocracy), 즉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로 다스림을 받는 신정국가 만을 인정했기 때문에 성전세는 내더라도 로마 정부,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나라에 세금을 낸다는 것은 부당하며, 거룩하지 못한 행위로 생각하였습니다.
유명한 유대 학자인 Edersheim 은 그의 저서에서 당시 레위와 같은 유대 관원들은 회당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어떤 종교 행사나 사회적 모임에 참여하여 동료 유대인들과 교제함이 금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마치 돼지와 같은 불결한 동물들로 대우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대우를 받던 레위를 예수님께서 보시고 “나를 좇으라”(14절하)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에게까지 예수님께서는 죄 사함의 손을 내미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레위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성경은 그가 “일어나 좇으니라”(14절하)고 하였습니다. 아마 그는 죄책감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필요를 깊이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유대종교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하는 죄 용서함 받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 일어나서 따릅니다. 누가는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눅 5:28)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주님의 단순한 부르심이 그의 과거와 소유한 모든 것을 다 버릴 수 있는 이유가 되었습니다(막 1:17-18). 로마 정부의 관원으로서 그 특권을 한번 버리면 다시는 되돌아 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대가를 치를 각오로 주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참으로 회심한다면, 중생함을 입었다면 그는 옛 삶을 청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옛 사람의 습관, 기준, 행실, 삶의 목적 등이 그에게는 더 이상 그 마음에 영향을 미칠 수가 없습니다. Edersheim 은 레위가 주님의 부르심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 그의 영혼이 전혀 기대하지 않던 은혜에 말할 수 없는 놀람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옛 삶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새 삶의 기쁨이 넘쳤던 것이었습니다. 비록 돈을 많이 버는 직장은 잃었어도, 앞날의 운명이 확실해졌습니다. 비록 물질적인 소유는 잃었어도, 영적인 부요함을 얻었습니다. 일시적인 보장은 잃었어도,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새 생명을 얻는 새 신자들이 다 그렇듯이 레위도 죄 사함을 받은 후에는 그의 친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누가에 의하면 죄인인 자신을 영접해 주신 주님께 감격하여 자기 집에서 잔치를 열었습니다(눅 5:29). 본문에는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15절)고 하였습니다.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그 잔치에 함께 하였습니다. 여기 ‘죄인들’이라 함은 의심할 여지없는 유대인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창녀들 그리고 종교적이지 못한 자들과 불경건한 자들 모두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그들과 함께 밥을 먹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레위의 반응은 즉각적이고도 긍정적인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새 믿음을 친구들과 나누는 것을 보면 그의 믿음이 얼마나 진지하고 참이었는지 열매로 나타납니다. 여러분들도 과거에 예수님께서 부르셨을 때에 레위의 반응처럼 긍정적으로, 믿음으로 반응하셔서 이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 그렇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부정적인 반응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영접하며 함께 하는 모습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정반대의 부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직접 예수님께는 말을 못하고 그의 제자들을 비방하며,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16절하)고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에게 그러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보고 그들은 역겨움을 느끼며 무참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가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왜 의인인 자신들과 잔치를 베풀며 함께 먹어야지, 어떻게 버림받은 죄인들과 먹는다는 말인가?’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들처럼 도덕적이고, 영적이며, 거룩한 자들이 어디 있는가?’ ‘자신들이 하나님의 친구이지’ 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들은 의인으로서 죄의 용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지금 예수님과 밥을 먹고 있는 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7절)고 하셨습니다. 누가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절하)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된 이유를 아주 논리적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첫째, 인간적으로 생각해도 건강한 사람에게 의사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병들어 아픈 사람이 의사를 찾는 것이 아니냐? 영적으로 죽을 병이 있으면서도 스스로 건강하다고 여기며 의사를 찾지 않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꾸짖으십니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마태는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 9:13절상)고 하신 말씀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너희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있느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무지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확실하고도 고귀한 명령을 따르지 못하는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는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여기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너희들이 주장하는 불완전한 말이 아니다. 그의 말씀은 사랑과 자비를 베풀며 죄를 용서하는 것이지, 심판하거나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십니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을 아십니까? 창녀이었습니다. 그녀의 남편 호세아에 대해 신실하지 못하고 정조를 지키지 못하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유하신 것입니다. 죄인인 고멜을 향한 호세아의 지속적인 사랑과 용서는 하나님의 인애, 죄인을 향하여 베푸시는 용서를 나타내는 모형(type), 그림입니다. 그래서 그 죄 용서함에 대한 보답으로 감사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의미에서 제사며 헌신의 번제인데, 그런 마음 없이 자기 의로, 자기 만족으로 제사며, 번제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제사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성경에 나타납니다(암 5:21-24). 그 말씀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십니다. 죄인의 친구로 오셨습니다. 즉, 죄인이면서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죄를 시인하고, 죄로부터 돌아서려는 자, 회개하는 자를 부르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의인으로 생각하고 주님을 부인한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요 8:21)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심령의 세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았던 것입니다(눅 18:10-14).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믿는 자기 백성들에게만 유효한 것입니다(마 1:2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는 오직 죄인들, 병든 자들에게만 베풀어지는 특별한 은총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하긴 우리가 어린 아기와 하늘의 색깔에 대하여 논쟁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율법주의자/유대종교지도자들의 비난에 대해 예수님은 더 이상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복음과 종교의 차이를 아십니까? 팀 켈러 목사는 1) 종교는 내가 법을 지키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아 주신다고 믿는 것이지만, 복음은 하나님이 나를 받아 주셨기 때문에 나는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2) 종교는 불안과 두려움이 하나님을 믿는 동기이지만, 복음은 은혜로 말미암는 큰 기쁨이 하나님을 믿는 동기이다. 3) 종교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기 위하여 순종하는 것이지만, 복음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를 닮아가기 위하여 순종한다. 4) 종교는 내 삶에 무엇이 잘못되면 하나님과 내 자신에게 화를 내며 원망하지만, 복음은 내 삶이 무엇인가 잘못되면 힘들어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훈련시키기 위하여 주신 고난이며 그 가운데서도 아버지의 사랑은 여전함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초청하십니다. 이 세상에 죄인이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데, 죄인임을 깨닫고 죄 용서함을 원하는 마음으로 회개하고 나오는 심령을 용서하시고 고쳐 주십니다. 죽을 병이 있음을 깨닫고 살릴 수 있는 의사에게 나아오는 사람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아니 아주 상식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고귀한 초청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대고 피합니다.
이 세상의 것을 다 얻어도 죽으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죽고 나면 우리의 영혼은 영원히 살게 되는데 지금 잘못 선택함으로 나중에 영원히 후회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오늘도 부족한 종을 통하여 설득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실 수 있기 바랍니다. 마음을 여시고 주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교회)는 고침을 받기 원하는 영적인 병자들을 위하여 있습니다. 정결케 되기를 원하는 영적인 추함과 가난함과 갈급한 자들을 위하여 있습니다. 하나님께 사랑받기 원하는 자녀가 되기를 원하는 경건치 못한, 불완전한 자들을 위하여 있습니다. 고침 받기 위하여 오는 환자들의 모임입니다. 이미 고침 받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자들이 환자들과 어울려 그들이 고침 받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하여 죽어가던 자를 살려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예배와 찬양과 섬김과 봉사를 하는 곳입니다. 그 받은 은혜와 인애를 베풀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