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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1-04-11 (일) 02:32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088    
실족하게 하지 말고, 또 용서하라 (눅 17:1-4)


대부분의 부모들은 누군가가 자기 자신들보다도 자기 자녀들에게 좋은 일을 하거나 유익을 끼치는 것에 더 감동을 받으며 감사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 자신들에게 잘못을 하면 쉽게 용서하는 사람들도 자기 자녀들에게 잘못을 하면 용서를 못하고 진노합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을 잘 돌보고 가르치며 격려하고 세우는 선생님이나 친구들, 선배들을 고맙게 생각하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누가 자기 자녀에게 악한 영향을 주며 죄를 짓게 하거나, 선생님들이 불신앙적인 것을 가르치며 믿음을 잃어버리게 하면 정상적인 믿음의 부모들은 진노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러한 부모의 심정을 가진 완전한 모델입니다. 왜냐하면 늘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대우받고 있는지, 사람들이 어떻게 대하는지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아버지로서 자녀들이 어두움의 세력들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잘 양육 받아 성장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에게는 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약속하기를 하나님의 자녀를 축복하는 자에게 축복하고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할 것이라고 약속하였습니다(창 12:3). 성도들에게 잘 대하며 격려하고 축복하는 자는 하나님께 축복을 받게 되어 있고, 그렇지 않고 그들을 실족하게 하거나, 해를 끼치는 자는 하나님께 저주와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지요?

누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유대종교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을 상대로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인정하지 않고 세상 나라를 위하여 살아가는 불의한 청지기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돈을 좋아하는 그들을 꾸짖으며 사람의 눈보다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율법과 선지자들의 말씀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난 주일 살펴본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도 훗날 칭찬 받을 신실한 청지기로 살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물론 죽음 이후에 영원한 지옥과 천국이 있음도 분명히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과 달리 하나님 나라를 중심하고 살아갈 때에 주의할 것을, 믿는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우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1절) 고 하십니다. 사람이 누구를 실족하게 하면, 특별히 연약한 신자를 실족하게 하면 그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평생 한번도 누구를 실족하지 않게 할 수 없는데, 실족하게 한 경우에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화를 내신다는 말씀입니다. ‘실족하게 한다(cause to sin or stumble)’는 원어의 뜻은 사람이 실족, 즉 넘어지도록 그 원인을 제공하는 것을 말하는데, 죄를 짓도록 유혹하거나 악영향을 미치어 사람이 죄를 범하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얼마나 싫어하시면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2절)고 비유적으로 표현하십니다. 믿음이 성숙하여 웬만해서는 실족하지 않는 성도들에게야 괜찮으나, 작은 자, 즉 비천한 자나 보잘것없는 자, 혹은 초신자나 믿음이 약한 자들을 실족하게 한다면 오히려 자신이 큰 맷돌을 목에 걸고 깊은 바다에 빠지게 되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합니다. 당시의 사형제도 가운데서 그렇게 연자 맷돌을 목에 매달게 하고 깊은 바닷속에 빠뜨리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죄 짓게 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진노하시는 일이냐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 필요한 것이 위로와 격려, 보호와 돌봄 등인데 오히려 그들을 실족하게 하여 죄에 빠지도록 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범죄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범하는 자는 하나님의 눈을 범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슥 2:8). 왜 성경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대하여 심하게 경고하느냐 하면 그들이 사탄을 섬기고 악을 행하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특히 신자들을 유혹하여 자기들과 같이 악한 영을 믿으며 죄악을 행하도록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단은 아니라 하더라도 만약 교회 안에서 경건치 못한 말과 행동을 하며, 불신앙적인 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여 죄의 길로 인도한다면 곧 하나님의 눈을 찌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자신들만 위선적이고 죄악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전통을 하나님 말씀 위에 놓고 따르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실족하게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들을 향하여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이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 2:21-24; 사 52:5)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신자들이건 신자들이건 할 것 없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실족하게 하여 죄를 짓도록 유혹합니까? 직접, 간접으로 혹은 스스로 죄악 가운데 나쁜 본을 보이면서 따라오게 하기도 하며, 은밀히 죄를 짓도록 몰아넣어서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만든다든지, 아니면 자기도 모르게 사탄의 공격을 받아 다른 사람까지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언젠가 다 계산될 날이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뒤를 이어 에베소교회 목사가 된 디모데에게 권면하기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딤전 4:12)라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목사나 전도사던, 장로던, 구역장이나 권찰이던, 지회장이던, 교사던, 집사던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집안에서 어른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알게 모르게, 좋은 영향이든 나쁜 영향이든 우리를 바라보는 자들은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을 보고 실족하여 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믿음으로는 우상 제사 음식도 먹을 수 있지만, 연약한 신자들은 시험에 빠질 수 있음으로 덕을 세우기 위하여 자신도 먹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고전 8장). 먹느냐 안 먹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실족하게 될까 주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실족하여 죄에 빠지도록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경건한 의의 삶으로 성장해 나가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괜찮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의 말과 행동이 제한되어도 좋다라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쁜 본보기가 되기 보다는, 예수님의 본을 받아 좋은 본보기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노엽게 하거나 거역하게 만들지 말고,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여 사랑하고 돌보며 선한 일을 하도록 인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세상 많은 책들이나, 잡지, 영화, TV 프로그램 등이, 세상 사람들이 신자들을 타락하게 합니다. 사탄 마귀가 죄의 올무(trap), 미끼(bait)를 수없이 만들어 놓아서 실족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깨어 경성해야 하며, 근신하여야 합니다.

본문 병행구절인 마태복음에서는 실족하게 하지 말라고 하신 후, 예수님께서 죄의 유혹으로 실족하게 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버릴 것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 18:8-9)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우리의 손이나 발이, 눈이 죄를 짓도록 실족하게 하면 잘라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다면 정상적인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손이나 발, 눈이 아니지요. 육체의 그런 부분을 잘라 낸다고 하여서 우리를 죄 짓지 않게 하지 못합니다. 죄악된 생각이, 마음이 문제지요.
지금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나 남을 실족하게 하여 죄 짓게 하는 그 무엇이든지 제거할 수 있는 것은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고통이 따른다 하더라도 실족하여 죄를 짓거나, 다른 사람을 죄 짓게 하는 것보다는 낫다라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습관, 상황, 관계, 아니 그 어떤 것이라도 여러분을 죄 짓게 한다면 영원히 잘라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마음과 생각을 단단히 고쳐서 철저하고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합니다. 싹부터 잘라내는 것입니다. 대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기 위하여 좋은 것을 심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좋은 책을 읽고 믿음의 사람들과 교제를 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게서 남이니라”(잠 4:23)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3절)고 하십니다. 사람이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 죄성을 지닌 사람의 본성은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오히려 미워하며 복수를 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 죄성이 아직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영접한 신자,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의 새 성품의 특징이 바로 용서입니다. 이유는 우리 예수님이 늘 용서하기 때문입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용서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끼고 사랑했던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억울한 재판을 받으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로마 군병들에게 모욕과 멸시를 받으며 침 뱉음과 매질을 당하며 십자가에서 죽으면서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의 잘못을 용서하는데 그렇게 어렵지 않음을 잘 압니다. 특히 친 부모라면 말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아직 미성숙하고, 경험도 적고, 알지 못하는 것이 많은 것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자녀들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는다 하더라도 용서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이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서 3절 서두에 “스스로 조심하라”고 강조합니다. 물론 1-2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누구를 실족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하지 못하고 복수할 마음이 일어날까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우선 형제나 자매가 죄를 지을 때 경계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경계하다(rebuke)”는 죄를 지적하고 엄중하게 경고하는 것을 말합니다. 뉘우치고 회개하도록 권면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개인적으로 권고하고, 듣지 아니하면 한 두 사람을 증인으로 데려가서 권고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처럼 여기라고 하셨습니다(마 18:15-20). 다만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면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4절)고 하였습니다. 이는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라고 질문한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즉 ‘회개하는 것은 좋은 데 계속해서 몇 번까지 회개를 받아주고 용서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당시 랍비의 전통에 의하면 세 번 정도 용서하지 그 이상은 용서하지 말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는데(4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2)고 하셨습니다. 내가 용서한 것을 세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셀 수 없을 정도로, 무한대의 용서를 말합니다. 참 성도라면 용서하면서 내가 몇 번 용서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늘 용서하고 사는 삶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가 누구를 실족하게 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특히 연약하여 상처 받기 쉬운 성도들을 실족하게 하는 죄는 하나님께서 엄청 화를 내십니다. 이유는 그도 이미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있습니다. 정말 조심해서 실족하지 않도록 잘 대하여야 합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을지 몰라도 내 옆의 형제나 자매가 실족하여 죄를 지을 수 있다면 당장 그만 두어야 합니다. 어떤 대가를, 희생을 치른다 하더라도 그런 말이나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오히려 겸손하게 친절과 사랑으로, 위로와 격려로, 아끼고 돌보는 마음으로, 함께 자라가며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양육 받고 있음을 잊지 말고 잘 대하여야 합니다. 우리도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실족하여 죄 짓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내 옆에 있는 형제, 자매들의 영적인 삶을 위하여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죄의 길에서 떠나 의의 길로 행하며 경건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여야, 축복하여야 하나님께서 여러분도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만약 어떤 사람이 우리를 실족하게 했다면, 잘못했다면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사님, 그렇게 계속 반복하여 죄를 짓고 또 회개한다고 말하면 그것이 참된 회개일까요? 정말 회개해야만 용서하는 것 아닌가요?’ 라고 질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죄도 구별해야 하겠지요. 의도적으로 짓는 죄가 아니라 연약하여 실수로 짓는 죄라면 몇 번이라도 용서해야지요. 그런데 문제는 고의적인 죄, 계획적으로 지은 죄입니다. 용서하기가 힘들지요. 그러나 그것도 잘못했다고, 회개한다고 하면 용서해야 합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 즉 490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에는 죄 지은 자가 진실로 회개하지 않아도 용서하라는 뜻이 아닐까요? 아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그렇게 용서하셨습니다. 사실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이 불편하지 않은가요? 사도 바울도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용서하기보다 복수하기 원하는 마음이 생길 때에는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롬 12:19; 신 32:35)고 한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고 갚으실 줄 믿으며, 우리 편에서는 용서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받은 은혜는 돌에 새기고, 원수의 잘못은 물에 새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받은 은혜는 영영 잊지 말고, 사람들의 잘못은 너그러이 용서하여 흘려 보내라는 뜻입니다. 성경 말씀의 교훈이기도 합니다. 늘 말씀을 기억하여 실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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